:[주의사항] 1. 해당 시나리오의 내용을 헨리와 아실리의 서사에 맞게 일부 개변한 항목이 존재합니다. 2. 아실리는 플레이 중 헨리의 풀네임을 자주 부르지 않도록 유의해 주세요. 다만, 플레이 중 지문의 단서를 찾아 헨리 맥고윈의 풀네임을 부를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추후 안내) 3. 아기 탐사자, 뭐든 해보시지 ^_^
그래요. 당신은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의 부재를 부정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러니 내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은, 당신의 연인이 아닌 헨리를 지나치게 닮은 다른 사람일 겁니다.
꿈보다 비현실적인 현실의 나날 속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이 있는 법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부정하고 잊으려 애를 써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당신만은, 당신만큼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혼란 속에 빠져있는 당신의 상태를 눈치챈듯,
막 버스에 올라탄, 지나칠 정도로 헨리를 닮은 그 사람은 당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앉아 있는 좌석 옆에 앉습니다.
헨리:안녕, 오랜만이야.
웃는 얼굴. 저 목소리.
답지 않게 약간의 장난끼가 어려 있지만, 온전히 당신을 향하는 다정한 빛의 눈동자.
처절하게 후회하고 그리워했기에 나날이 새로운 그리움과 슬픔을 느끼게 했던 그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정차했던 버스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태운 채,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당신은 기어코 받아들이고 맙니다.
당신의 연인을 닮은 이 사람은,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 아닌 헨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요.
당황했나요?
아니면 반가운가요?
혹은 슬픈가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가슴 속에 응어리로 자리 잡습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혹여나 꿈에서라도 다시 만날까 준비해 두었던 말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헨리:(머뭇거리며 말을 건내지조차 못하는 너를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응시하다 문득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차체에 휘청이는 네 몸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준다.) 많이... 야위었네. (한때는 아무렇지 않게 붙어 왔던 거리감을 조금은 어색해하고, 크게 놀란 것 같은 네 모습에 잡았던 손을 천천히 떨어트리며 시선을 맞춘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운 모양이야. 차가 이렇게 흔들리고. 그보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어딜 가던 중이었어? 비 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아실리:(익숙하다면 익숙하고, 익숙지 않다면 익숙지 않은 네 목소리에 숨을 멈췄다. 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다시 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가 아는 네가 맞는 걸까. 그 잠깐의 고민마저도 후회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저를 붙잡았던 팔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정말… 정말 헨리 네가 맞는 거야…?
헨리:(몸은 제 기억 속의 그때보다 더 야위었고, 늘 맑고 따뜻한 빛으로 반짝이던 눈동자는 아직도 다정한 빛을 잃지 않고 빛나고 있지만, 조금은 침체되어 흐림을 담고 있다. 네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아도 보여지는 잠깐을 시선에 담았을 뿐인데도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어서,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왜 이렇게 야윈 거야. 식사는 잘 하고 있는 거지? 목소리도 조금 상했나? 꼭 지난 겨울에 지독한 감기에 걸렸던 그때처럼.... 너를 만나면 해 주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지만 정작 쉽사리 입 밖으로 전할 수 있는 말들은 게중에서도 아주 얄팍한 것들로 여과된 몇 마디의 말 뿐이다.) ......응, 나야.
아실리:(네 대답에 울컥 울음에 배여 나왔다. 괜찮다는 거짓말은 사치란 걸 알면서도 네게 거짓말을 뱉어냈다. 떨리는 손을 뻗어 네 손을 마주잡았다.) 너를… 만나러 가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이 말이 너에게 어떤 의미로 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네 옆을 떠나간 네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마주잡았던 손을 올려 네 볼을 감싸곤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헨리:(제 볼에 닿는 온기는 이렇게도 따뜻하다. 몸을 벌벌 떨 정도로 슬픔을 가누지 못하면서, 저를 먼저 위로하려는 듯 얹어진 손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부드럽게 끌어안아 가볍게 등을 토닥인다.) 나를 만나러 와 주고 있었구나.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이제는 전해주지 못하고, 네게 일방적으로 전달받을 몸의 온기는 애써 감추려 해 봐도 소용 없겠지. 언제고 네가 따뜻하다며 맑게 웃으며 얘기했던 내 손은 이제는 네게 얹기 미안할 정도로 차게 식어 있어서. 제 볼에 올려졌던 네 손에 이미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옷 위로 어설프게 네 등을 토닥이면서도 차마 네게 차가운 손이 닿게 되지는 않을까 망설이게 되는 건 네게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어설픈 치기일지.) 네가 아직 나를 잊지 않고 있어 줬다는 거, 그거 하나면 충분해. 알고 있잖아. (제 품에 안긴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말 없이 품 안에 끌어안으며 토닥이다 옷소매로 조심스럽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준다.)
아실리:(괜찮다는 네 말은 왜 슬프게 와 닿는지. 어쩌면 너도 나도 알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은 네게도 내게도 상처밖에 되지 않는 말이란걸. 그건 차갑게 식어버린 네 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정말 너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한 척, 다 괜찮은 척을 하고 있을 걸 알기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의미 없는 질문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꿈속에서도 듣지 못한 네 목소리를 이렇게라도 들을 수가 있다는 게 행복해서. 이 순간이 꿈이라도 좋았다. 네 품 안에 안긴 채 숨만 색색 내쉬며 가만히 네 손길을 받아들였다.)
헨리:(차의 흔들림에도 네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받쳐 안고는 느릿한 손길로 토닥인다.)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그걸 얘기해 주기 전에, 잠깐 저쪽을 볼래?
헨리:이곳은 완전한 현실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세계, 많은 것들이 비슷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곳.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할지 잠깐 고민하며 곤란한 표정을 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는 네 꿈속이야. 나는 너를 만나고 싶어서 네 꿈속에 들어왔어. (운전 기사도 없이 그저 앞을 향해 달리는 버스 운전석 쪽을 짧게 응시하다 희미하게 웃으며 네게로 고개를 돌린다.) 네가 가기로 한 곳까지 길을 잃지 않도록... 내가 동행할게.
아실리:(지금 네가 내뱉는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부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부분에서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곳. 내게서 가장 중요한 네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렇지만 내가 가는 길을 함께하겠다는 네 말을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이 길을 너와 함께하고 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너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내가 지금 너와 함께하고 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믿고 싶지 않지만 네 말을 믿고 네가 내미는 손을 맞잡아야만 했다. 괜찮을 것이다. 네가 택한 길에 올바르지 않은 것들은 없었으니까.)
헨리:(내가 건넨 것 이상을 묻지 않는 너. 과거와 마찬가지로 침묵을 택한 나. 최후의 순간과거로 돌아간다면하고 수 없이 생각했던 후회들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다시 주어진 기회에도 했던 잘못들을 반복하는지.) 자, 이제 내리자. (네 쪽으로 몸을 기울여 버스의 벨을 누른다.)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네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내가 바래다줄게.
아실리:(네 손을 꽉 잡은 채로 버스의 뒷문 앞에 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신코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할 목적지, 네 옆. 그 곳을 가지 못해서 현실을 삶을 맴돌았다. 죽지 못해 사는 이 삶이 너무 고달팠다. 하지만 네 몫까지 잘 살아야 했으니까. 네게 가는 걸 넌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눈물을 꾹 참으며 고개를 들어 제 옆에 선 널 바라 보았다.) 잠시만이라도 괜찮으니까 내 옆에 있어 줘. 내가 갈 곳까지… 함께 걸어 줘.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처리된 정류장 지붕 아래, 양옆으로 담장 형식의 벽면이 기둥처럼 세워져 있고 그 중앙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버스 그림이 새겨진 표지판 또한 눈에 띕니다.
헨리:(벤치에 앉자 조용한 소음이 내려앉는다. 플라스틱 판 위를 두들기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는 빗소리와, 이따금 정류장 앞쪽 웅덩이에서 나와 네 쪽으로 튀겨지는 물방울 같은 것들. 언젠가부터 많은 것을 말할 수 없었던 나와 그 이상을 묻지 않았던 너, 함께 있는 시간은 매번 행복했지만 그 간격을 좁히지 않는 것이 서로를 향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벽면]과 [벤치], [표지판]을 살필 수 있습니다.
아실리:(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너와 나의 관계는 항상 그렇게 이어졌었다. 사소한 것 하나 내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해 주던 네가 말하지 않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고, 난 그렇게 생각을 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제 옆에 앉아 있는 너를 계속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우리가 앉은 벤치로 시선을 넘겼다.)
:[벤치]
원목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나무 벤치입니다. 지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주는 탓에 젖은 부분 없이 바짝 말라 있습니다.
[벽면]과 [표지판]을 살필 수 있습니다.
아실리:(언젠가 너와 광장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진 지금 이 순간에 괜히 헛웃음이 났다. 손으로 벤치 끝을 살짝 훑다 고개를 찬찬히 들어벽면을 바라보았다.)
아실리:(빗소리 너머로 작게 들리는 네 질문의 대답을 떠올렸다. 흰 국화의 꽃말은 감사함과 진실함. 왠지 모르게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했던 것이 맞을까. 숨을 가다듬으며 네게 대답했다.) 감사함, 그리고 진실함….
헨리:(고개를 끄덕이며 국화 쪽에 힐끔 시선을 준다.) 정확해. 먼저 앞서 떠난 사람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담아 감사를 보내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국화를 보낸다고도 하잖아. (물기가 배여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에 기분을 풀어주려 네 어깨에 가볍게 얼굴을 기대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너라도 이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국화꽃의 색에 따라 꽃말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어? 개량종에 가깝긴 하지만.
아실리:(갑작스레 제 어깨에 기댄 네 행동에 숨이 멎었다. 참았던 눈물이 볼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가 볼까 흘러내린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곤 손을 올려 네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음…, 어떤 색의 국화를 말하는 거야?
헨리:많지. 분홍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보라색도 있고... 사실 만들려고만 하면 끝도 없이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장미처럼.
얼추 짐작가는 것은 있지만 장미와 다르게 품종 개량된 국화는 수요가 많은 것이 아니라 특별 주문을 넣지 않는 이상 쉽게 보이지 않죠.
곰곰히 고민하다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으면 당신을 향해 그가 얕게 미소 짓습니다.
직후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다"는 말을 하며 눈을 감습니다.
[표지판] 을 살필 수 있습니다.
아실리:(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네 볼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온기가 없이 차가운 감각. 너를 잃었던 그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 제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곤 정류장 옆에 세워진표지판을 바라보았다.)
:[표지판]
간략한 버스 그림이 새겨진 정류장 표지판입니다. 표지판 아래 버스 노선도가 붙어 있습니다. 당신이 노선도를 확인하면… 평범한 노선도가 아니네요. 아니, 이를 노선도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버스 노선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노선도 대신 '색상에 따른 국화꽃의 꽃말'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설마 내가 헨리의 이름을 불러야 다음 버스가 도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요.
아실리:(정말 실없는 생각이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을 조심스레 불러 보았다.) … 헨리.
헨리:(고개를 네 쪽으로 돌렸다가 눈을 조금 크게 뜨다 이내 푸스스 웃어 버린다.) 응, 나 여기 있어.
아실리:(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이며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가 들리지 않도록 작게 너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헨리… 맥고윈.
헨리:(네가 아주 작게 부른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네 목소리를 기억할 거야. 들리는 제 이름에 너를 꼭 끌어안으며 토닥인다. 이제 네가 아니면 부를 사람도 없는 이름인데도 너는 꼭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조심스러워서.) 내 이름이 이런 느낌이었나? 항상 그렇게 불려 와서 잘 몰랐는데. (응, 조금 간지럽네. 하하 웃으며 바람에 조금 흐트러진 이마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춘다.) 그거 알아? 내 이름과 달리 네 이름은 꼭 바람처럼 발음이 부드러워서 솜사탕처럼 널 닮은 이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 동생에게 물어봤더니 그 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 아실리, 지나, 아델라인. 네 이름은 꼭 가장 부드러운 것들을 모아서 뭉쳐둔 것처럼 들려. (쿡쿡 웃으며 이젠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 애에게 손을 내민다. 조금 차갑게 식었더라도.)
헨리:(다가오는 버스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아직 제 손을 잡지 않은 네 손을 먼저 조심스럽게 잡아낸다.) 너무 많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어디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내가 함께 있을 테니까. (열린 버스의 문쪽으로,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다가가며 너를 에스코트 한다.)
아실리:(오랜만에 듣는 네가 불러 주는 이름. 그 목소리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넌 다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괜찮지 않았나 보다. 정말 간절하게 듣고 싶었다. 다정하게 불러 주던 내 이름을.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무런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거푸 닦아내며, 너와 시선을 마주하려 애썼다.)
(잠시 후,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섰다. 왠지 이 버스를 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너와의 이별이 가까워질 것만 같아서. 단 한 번이지만 꿈에서 네가 나온 적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뒤로 한 채 날 두고 떠났던 네 모습처럼. 지금 내 눈 앞의 너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 하지 못했던 이별 인사를 지금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너를 내가 직접 보내 줄 수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주잡은 우리의 손을 바라보다,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네가 에스코트 하는대로 버스의 앞문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헨리:(여전히 창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 잠깐의 침묵을 끊고 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춥진 않아?
아실리:(아무런 생각 없이 창밖에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들리는 네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너를 마주 보았다.) 응? 아… 춥진 않은 것 같아. 괜찮아. 헨리 넌 춥진 않고? (아, 이런 걸 묻는 건 실례가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당황한 듯 눈만 도르륵 굴리며 네 눈치를 보았다.)
헨리:(쿡쿡 웃으며 장난스럽게 네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왜 말을 하고 놀라고 그래? 괜찮아. (국화꽃이 조금 시든 것을 보자 어쩐지 슬픈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꽃은 항상 땅에 심겨져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꽃에 담긴 마음은 항상 사랑스럽고 고맙지만 조금씩 말라가는 걸 보면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네.
아실리:(제 품에 안고 있던 국화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따라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음, 어쩔 수 없지…. 헨리 네 말대로 꽃은 땅에 심겨져 있을 때 자신의 원래 삶을 살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그 잠깐의 순간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거니까 마냥 슬프게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헨리:어쩌면 꽃들도 누군가에 의해 키워지고, 그 쓰임새를 명명받는데 사람도 똑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누구나 자기 자신의 자리가 있는 법이지만 그걸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이 전부 스스로의 선택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 해서.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주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짤막한 뒷말을 속으로 감추며 기지개를 편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운전이 괜찮은데? 덜컹거림도 덜하고 말이야.
아실리:(기지개를 펴는 네 모습을 보다 장난스레 옆구리를 콕 찔러 본다. 그리곤 텅 비어 있는 운전석을 한번 바라보고 문득 드는 이질감에 몸을 파르르 떨다 다시 네게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한다.) 음, 그런가…?
헨리:(제 어깨에 기대어 잠든 몸이 작게 부스럭거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네게로 둔다.) 일어났어?
꼭 빗물에 익사할 것만 같이 무겁던 정신을 흔드는 것은 잔잔하고도 담담한 그의 목소리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곳은 버스 정류장인 것 같습니다.
꼭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만 같이, 끊임없이 펼쳐진 도로 한가운데 마련된 간이 정류장입니다.
어느 틈에 하차한 걸까요.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잠깐 사이에 헨리에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실리:(언제 잠들었던 걸까. 생생하던 그 순간들은 그저 꿈이었던 걸까. 기억에서 지워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네 어깨에서 살며시 고개를 떼어냈다.) 언제 잠든 거야 나…? 버스에선… 헨리 네가 데리고 내린 거야? 불편했겠다, 미안해.
헨리:(소리내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다.) 괜찮아, 괜찮아. 얼굴이 조금 지쳐 보였는데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야. 기억나? 예전에 도시락을 만들어서 같이 소풍 갔을 때도 잠들어서 밤하늘까지 보고 돌아온 적이 있었잖아. 그때 참 좋았는데.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지? 짤막하게 덧붙이며 네게 시선을 맞춘다.)
아까 전의 사고는 역시 꿈이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멀쩡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질 나쁜 꿈이라도 꾼 모양입니다.
아실리:그러게…. 그때 정말 행복했었는데. 괜찮아, 그냥 잠을 조금 못 자서 피곤했나 봐.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어쩐지 모를 미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정말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너의 눈을 마주보고 예쁘게 웃어 보였다.)
헨리:피곤하면 잠깐이라도 더 잘래?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있는 것만 같다는… 이유 모를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겠죠. 그는 이곳이 당신의 꿈속이라고 했으니 언젠가는 꿈이 깨기 마련일겁니다.
과연 이 꿈에서는 언제 꺠어날 수 있게 될까요?
꿈속에서라도...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요.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고 버스가 오는 그 과정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쉽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실리:(다음 버스가 꼭 와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처럼 그의 이름을 호명하였을 때 다음 버스가 오는 거라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든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아까 다짐했듯 그를 보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진 않았다.) 헨리…, 있잖아. 넌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단 한순간이라도 후회한 적이 있어? 그냥… 정말 그냥 궁금해서.
헨리:(그 애의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없어. 단 한 순간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대답이 튀어나와 저 스스로도 당황하게 된다.) 그... 물론 살면서 후회한 순간은 많았지. 자잘한 것부터 인생을 바꿀 정도로 큰 선택을 했을 때, 혹시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떨까 하고 고민한 적도 많고. (하지만 결국 후회는 늦고 미련은 어리석지. 당장 해낼 수 있는 것에 충실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다만...) 하지만, 하지만 그 어떤 때에도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을 후회했던 적은 없었어.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았다면 모를까. (저 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에 네가 놀라지는 않을지. 하지만 이 짤막한 몇 마디 말에라도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야.
아실리:(혹시나, 정말 혹시나 그런 마음이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너를 잃고 많은 후회를 했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너의 시간에 오점을 남기진 않았을까. 내가 너의 시간에 없었다면 너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여 네 사람들 옆에서 행복하게 살진 않았을까 하는 그런 후회.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대답에 안도감과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이 함께 밀려왔다.) 네게 그런 사람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냥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어. (네가 많이 지쳐 보여서, 지금의 내가 네게 짐으로 미련으로 남아서, 그래서 네가 떠나지 못하고 지금 내게 와 준 건 아닐까 싶어서. 뒷말을 속으로 꾹 삼켰다.) 고마워, 헨리. 정말 고마워….
헨리:(굳이 많은 것들을 입밖으로 내지 않아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떨리는 목소리, 어쩐지 눅눅함을 품고 있는 눈동자, 동요를 감추려 옷 아래로 감추는 손끝.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굳이 들추려 하지 않았던 순간과 꺼내려 하지 않았던 잠겨 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렇지만 나는 또 네게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게 돼.) 나는 너를 알지. 그리고... 너도 나를 알고. (또 전하지 못하는 말들이 다시금 침전된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이 후회인지, 미련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기분에 조심스럽게 너를 꼭 끌어안으며 작게 도닥인다. 너를 안고 있어도 내가 안기는 것 같아. 너를 위로하려고 하는 행동에 되려 위로를 얻는 건 항상 나였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지.) 나는 언제나, 항상 네 행복만을 바라.
아실리:(함께여서 더 행복했다는 걸 분명 너는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럼에도 내게 할 수 있는 너의 위로는 지금 그 말이 최선이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다른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서로를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위로. 가만히 네 품에 안겨 도닥임을 받다, 손을 올려 너를 똑같이 끌어안았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도 이것밖에 없다는 것마냥, 제 품으로 더 꽉 끌어안으며 한 손으론 너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론 네 등을 도닥여 주었다.) 헨리 네 말대로 다 괜찮…을 거야. 그렇길 바라. 그리고 난…, 우리가 함께 행복하길 바랐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헨리:(그래. 이거면 됐다.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고민에 대한 해답. 그러니까 이제 더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행복에는 수많은 기준과 상대성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에 감사하며,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그러니까... 아실리, 아실리 지나 아델라인. (내 사랑하는 사람아. 너도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이지만 너무 많이 닮았고, 또 많은 것들을 공유해 왔으니까.) 너는 언제나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었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선택하는 길이 어떤 곳이든 내가 함께 있을 테니까.)
아실리:(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너와 함께 걷는 길을 택한다. 너는 내가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라 말하지만, 그 모든 길의 끝에는 네가 있었기에. 그래서 그 길을 걸을 수 있었음을. 넌 지금 이 순간이 내 꿈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내 꿈이었다면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왠지 너를 보내야만 할 것 같아서.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 헨리, 헨리 맥고윈. (내 사랑하는 사람아. 난 너와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너와 함께하고 함께할 시간들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무겁게 허공을 가르는 당신의 목소리는.
어째서 이만큼이나 빗물에 수몰될 듯 참담히 젖어있는지.
얼마 있지 않아 세 번째 버스가 저 멀리서 빗속을 헤치고 다가와 정차합니다.
버스는 지금까지 승차했던 버스와 달리 커다란 2층 버스입니다.
두 사람 앞에 멈춰선 버스의 탑승구가 입을 벌립니다.
타고 싶지 않아요.
그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충동만이 내 안에 가득합니다.
헨리:괜찮아. 내가 같이 있잖아, 무서워할 거 없어. (늘 그래왔듯 네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아실리:응. (속을 가득 채운 두려움을 애써 눌러내며, 제게 내민 네 손을 잡았다. 천천히 버스 앞문을 향해 걸을을 내디뎠다.)
갓 생명을 피워낸 듯 하얗고 투명하던 꽃잎은, 이제 그저 계절을 잃은 이름 모를 들꽃처럼 보여요.
단지 몇 송이의 국화만이 처량히 바래진 꽃잎의 색을 발할 뿐입니다.
이번에는 헨리가 앞서 들어가 창가 좌석에 앉습니다.
세 번째 버스에 탑승한 뒤로 그는 어쩐지 멍한 상태를 유지하며, 지친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를 따라 자리에 앉으면, 좌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실리, 책을 어떻게 하나요?
아실리:(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고민을 하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책을 주워 무릎 위에 얹어 놓곤, 네 어깨를 톡톡 쳐서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헨리, 많이 피곤해 보여. 눈이라도 좀 붙이는 건 어때…?
헨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에게 기대어 옵니다.
주웠던 책을 들어 올려보면
책이라기보다는 얇은 책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푸른색의 표지에는 아기자기한 회전목마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화려하고도 쓸쓸한 푸른 대낮의 회전목마네요.
제목은 'Merry go round' …메리 고 라운드. 회전목마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며, 막 망자를 위한 길로 들어서기 직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흔히 인생의 주마등과 마주하곤 한다.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이 눈앞에서 한 차례 영화처럼 펼쳐지는 현상을
주마등 현상이라고 일컫는다.
죽음의 끝에 당도한 산 자여,
그대의 삶이 적어 내려간 필름의 길이를 돌아본 적이 있는가.
책자의 내용을 살핀 직후 당신은 강한 현기증과 함께 정신을 잃습니다.
빛도 한줄기 들지 않는 맨 밑바닥의 어둠 속에서, 환각을 마주합니다.
환각 속에 삶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가장 슬펐던 순간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반짝이던 삶의 조각이,
어느 순간 그 삶에 뿌리를 내리고 침범한 그와의 첫 만남이.
…단 한 가지도 빼놓을 수 없는 여러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었던 기억
처음으로 그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던 기억
고조되는 행복감에 웃어 버렸던 순간.
한동안 빠른 속도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잠시간 필름이 뚝 끊기며 말간 어둠이 지속됩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다시금 빛처럼 터져 나오는 영상이 하나.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헨리와 당신,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차창 바깥으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 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다정하며,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체온이 따스한 손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고즈넉한 빗소리의 향연마저 서로 간의 애정에 담뿍 물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쾅―!!
반대편 차선을 지나치던 트럭과 버스가 갑작스레 충돌합니다.
직후 들려오는 것은 커다란 굉음.
쇠가 굽어들고 절단되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금속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 날아가는 소리, 어딘가에 들이박는 듯한 충격.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
쉼 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어두운 화면 사이로 그런 당신을 한 점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강한 힘으로 당신을 품에 끌어안고, 쏟아지는 모든 것을 대신 맞아냅니다.
아니, '누군가'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의 곁에 사시사철 피어나는 국화처럼 존재하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늘 당신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으며, 온 생애를 다해 열렬히 사랑해주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야… 그 사람 아닙니까.
헨리입니다.
그가 억센 힘으로 당신을 끌어안았습니다.
암전하는 버스의 내부를 어둡게 띄우며 필름이 또 한 차례 뚝 끊겨나갑니다.
떠오르는 영상의 날짜는… 1년 전의 오늘입니다.
아, 그제야 지금까지 서리가 내린 듯 희뿌옇기만 하던 기억 하나가 마치 퍼즐 조각처럼 달라붙습니다.
아실리:(제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그를 살짝 흔들어 깨워 봐도 미동이 없자, 그를 살며시 반대편 창가로 기대게 옮겨 준 후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웠다. 아까 보았던 2층 입구의 자물쇠가 생각이 나 조심스레 일어나 걸을음 옮겼다. 굳게 잠겨 있는 2층 입구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넣어 천천히 돌려 본다.)
자물쇠에 아까 얻었던 열쇠를 끼워 넣으면 금속이 맞물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버스 2층이 개방됩니다.
버스의 2층으로 들어서면, 그 장소는 이상하게도 단출한 방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차창에서 물기를 머금은 탁한 빛이 터져 나와 내부를 은은히 비추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책상과 책장, 그리고 침대 하나가 놓여있네요.
각각 [책상]과 [책장], [침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아실리:(자신의 공간이 아닌 곳에 함부로 들어와도 괜찮은 걸까 싶었지만, 왠지 그래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심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와 눈 앞에 가장 먼저 보인책상앞에 다가섰다.)
:[책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책상 위에는 그 흔한 필기도구도, 책도, 사용감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흔한 먼지 하나조차 쌓여있지 않네요. 말끔하다 못해 쓸쓸해 보이는 책상 한가운데 반으로 접혀 있는 쪽지만을 한 장 발견합니다.
아실리, 쪽지를 어떻게 하나요?
아실리:(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민을 하다 조심스레 집어 들어 접힌 쪽지를 폈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책장]과 [침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실리:(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내용의 쪽지.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내 꿈이고, 내가 만약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서 이 꿈을 꾸는 거라면. 그럼 지금의 너는 나를 인도하러 온 사자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따라 가는 게 맞는 걸까. 괜한 생각이길 바라지만 불안한 예감은 틀리질 않아서…. 고개를 저어내며 쪽지를 다시 곱게 접어 책상 위에 놓아두곤 옆에 놓인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장]
책장에는 책이 한가득 꽂혀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읽을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검은색의 책등만이 마치 밤하늘처럼 빼곡히 즐비합니다.
관찰 혹은 자료조사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실리:
자료조사
기준치:
90/45/18
굴림:
3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쪽지를 한 장 발견할 수 있습니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의 이름은 곧 다음 생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 전까지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 그 안식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사자는 산 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세 번의 호명 끝에 산 자는 비로소 망자가 된다.
아실리:(평소엔 부르지 않던 성까지의 내 이름을 불렀던 네 목소리가 떠올랐다. 첫 번째 정류장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의 버스를 타기 전에 또 한 번. 총 두 번, 네가 나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건 단 한 번의 호명이라는 걸까. 평소 듣던 이명과는 다른 기계음 소리. 내가 만약 현생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중이고,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모습으로 내 길을 안내하러 온 거라면 난 정말 미련 없이 널 따라 갈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해 하고 있는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다른 선택의 기회가 있긴 한 걸까. 문득 두려움이 들었다. 내가 정말 너를 잃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되었다는 게. 나를 데리러 온 너를 따라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택하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침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실리:(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잠깐이라도 앉을 곳이 필요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뜨며 쪽지를 손에 쥔 채로 옆에 놓인침대로 향했다.)
:[침대]
꼭 병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병실용 침대입니다. 다가서면 커튼이 반쯤 쳐져 있습니다. 커튼 위로 핀이 꽂힌 명찰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찰에는 '아실리 지나 아델라인'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문득 당신은 뼈를 치고 사라지는 기시감에 휩싸입니다.
조금 급한 손길로 커튼을 완전히 걷어내면 드러나는 것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 병실의 매트리스 침대.
침대 주변으로 즐비한 온갖 의료 장치들…
그 사이에 푸른색 담요를 덮고 누워 있는 사람은 입가에 산소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제야 당신은 형용할 수 없었던 기시감의 정체와 마주합니다.
아실리, 당신이잖아요.
병상에 누워 끊임없이 즐비한 갖가지 의료 기계들 틈 사이에서, 산소 호흡기를 뒤집어쓴 채 실낱같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아주 자연스럽게도, 정류장의 상단에 자리하고 있는 버스 도착 안내 전광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까지의 전광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의 노이즈도 끼어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온전히 모든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전광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자가 인도를 받을 자의 이름을 호명할 때, 마지막 버스가 도착합니다.'
그래요. 그랬던 겁니다.
이름의 불러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헨리였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가 각 정류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호명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고 보면, 꼭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뒤에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던가요.
그야 당연하잖아요. 저 메시지에 따르면… 인도자는 헨리.
인도를 받을 자는, 망자의 길에 들어선 자.
죽음의 여로에서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타 있던 자. 바로 아실리, 당신입니다.
그렇지만 왜일까요.
한참이 흘러도 헨리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기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습니다.
타닥타닥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강해지고, 이따금 발목까지 튀는 빗물 같은 건 전혀 상관쓰지 않는 것처럼
어떤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이 길고도 오랜 꿈이 이제 끝을 보이려 하고 있는데도 그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아실리:(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모든 걸 깨달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아무런 말 없이 네 손을 잡고 따라가면 되는 건지. 아니, 선택권은 내게 주어진 게 아닐 텐데 어떠한 말을 하든 소용이 있을지. 사랑하는 너의 모습으로 나를 데리러 온 사자를, 아니 내가 사랑하는 너를. 내 모든 것이었던 널 잃지 못해 네게로 손을 뻗어 본다.) …헨리.
당신은 첫 번째 버스에서 조우한 직후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헨리의 표정을 마주합니다.
그는… 기뻐 보입니다.
동시에 슬퍼 보입니다.
한편으로 어딘지 홀가분해 보이는 눈으로 당신을 봅니다.
그는 어깨에 기대고 있던 당신이 일어나 손을 뻗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손을 잡아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생전 즐겨 입었던 외투를 벗어 당신의 어깨에 걸쳐줍니다.
헨리:동물학적으로 봤을 때, 사람은 유일하게 '미련함'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잖아.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룩하고, 많은 것들을 창조해내고 또 발전시켜 나가지만 많은 순간에서 과거에 잡혀 살거나... 과거의 기억으로 살거나, 과거의 것들이 바탕이 되어 살아간다고. (어딘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빗물의 백색소음에 힐끔 시선을 주다 다시금 네게 시선을 고정한다.) 온전히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과거에 연민을 남기는 건 인간만이 가진 '미련'인 동시에 '미련함'
세상에 이렇게 수많은 동물들이 존재하는데 왜 인간에게만 그런 특성이 생긴 걸까? 그 칼럼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암울한 과거를 가진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을 얻고, 찬란한 과거의 기억이 있는 사람은 그 기억으로 현재를 버텨나간다. 역사를 이뤄내지 못한 사람은 미래를 보고... 미련을 남겨둔 사람은 과거의 시간들에 연연해 하게 되겠지.) 100페이지가 넘는 칼럼이었거든. 주제가 흥미로워서 끝까지 꾹 참고 봤지만 결말이 어땠는지 알아? 아무리 많은 학자들이, 저명한 학계의 인사들이 연구를 하고 또 해도 그 원인을 밝혀낼 수는 없었다... 로 마무리가 났어.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모양이다라는 식의 허무한 결말이었지. 하지만 내가 정말 학부생 때 읽었던 이 칼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바람에 외투가 한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걸쳐두었던 외투를 손수 입혀 준다.) '미련함' 이라고 평가절하 되는 그 의문뿐인 감정이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살게 만든다... 라는 구절 때문이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를 우산을 펼칩니다.
펑.
우산대가 방수천 재질의 우산면을 밀쳐내며 펼쳐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어느새 바뀌어 버린 그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까만 정장.
헨리는 꼭 세상이 말하는 인도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금, 고요한 침묵이 다시금 내려앉고...
눈물 같은 목소리가 허공을 가릅니다.
헨리:좋은 밤이야, 내 사랑.
당신이 내밀었던 손을 맞잡지 않았던 그는, 문득 당신에게로 우산을 기울입니다.
사방은 어느새 컴컴해져 있습니다.
헨리:우리의 목적지가 바뀌었어. 처음에 했던 말... 기억해? 네가 어디로 가더라도 도중에 길을 잃지 않도록, 가야 할 목적지까지 함께 가겠다고 했었지. (빗물에 잠겨 제 목소리가 젖어 보이지는 않으련지, 목소리를 떨리지 않게 간수하며 마지막 행선지를 향한 여행을 권한다.) 이곳에서 버스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게 된 걸, 진심으로 다행으로 생각해. 건너편 정류장으로 넘어가자. 네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아실리, 그는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도 당신이 내민 손을 잡아 주지도 않습니다.
아직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를 따라갈건가요?
아실리:(갈 곳을 잃은 손은 허공을 헤매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너의 말에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다짐하지 않았던가. 너와 함께 가겠다고, 마지막 행선지를 향해 함께 걷겠다고. 괜찮다, 괜찮다를 수도 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괜히 미적대는 걸음이 꼭 우리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했다. 고민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너를 따라 가면 어떠한 이유로든 정말 이별일 것만 같아서.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미룰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아니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며 너를 따라 건너편 정류장으로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두 사람은 천천히 반대편 정류장을 향해 이동합니다.
발끝을 적시는 빗물은 기실 뜨거운지도, 차가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헨리:(이별을 미룰 수는 없겠지. 하지만 왜인지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여력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충 눈치채 작게 웃음을 머금는다. 나는 언제나 항상 네 평안만을 바라고 있는데도.) 아까 네가 꿈속에서 봤던 것들은 전부 다 사실이야.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오래된 것들부터 얘기하는 편이 맞겠지. (천천히 기억을 거스르며 말을 고른다. 어떤 말을 해야 너를 설득할 수 있을지.) 오늘이 내 기일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딱 1년이 지났겠네. 꿈속에서 봤던 그 사고에서 나는... 너를 끌어안고 죽었어. 그 뒤의 일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너는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1년째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고 들었어. 그래... 마지막에 봤던 그 병원 말이야.
(그뒤의 것들은... 제 입으로 말하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처참한 것들이라, 어떻게 네게 설명해야 할지 마음이 무거웠다.) 너는 잘 버텨내고 있었어. 비록 1년 가까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떠는 팔에 우산이 기운다. 내색하지 않고 다시금 우산을 고쳐 잡았다.)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지. ...그래, 너는 죽어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런 네 영혼을 노리는 존재들이 있었어. (누군가에게는 구원과도 가까웠던 네 맑음 때문이었을까. 능력과, 그것 못지 않은 다양함이 공존하던 능력자들의 세계에 발을 담았던 저조차 믿기 힘들 정도의 이야기들을 네가 믿어줄 수 있을지. 네게 과거를 설명하는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수도 없이 떠올렸음에도 왜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더듬거리며 얘기하게 되는 걸까.) ...나는 그런 너의 영혼을, 안전한 안식으로 이끌기 위해...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임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네게 죄스럽게 생각한다. 네 어떠한 의사조차 생각하지 않은 내 일방적인 결정이었으니까.) 어떠한 존재...와 계약했어.
그리고 그 계약을 통해서 너의 영혼을 안전한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과 힘을 얻게 됐어. 지금까지 지나쳐 왔던 버스들도... 그리고 정류장에서 한 번씩 몰래 네 이름을 불렀던 건 결국... (너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차마 뒤 이어 얘기하지 못한 말을 탄식으로 내뱉으며 멈추어선다.)
그는 꼭 금방이라도 빗물에 함께 휩쓸려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헨리:하지만, 이제는 네 이름을 더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 중간에 우리를 도와준 다른 존재가 있거든. 다행스럽게도 널... 다시 삶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됐어. (한때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던 맞은 편의 정류장을 힐끔 쳐다보며, 네가 가지고 있던 국화 꽃다발에 시선을 준다.)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미 알아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꽃다발은 네 생명 그 자체야. (작은 떨림을 간직한 손으로, 네 꽃다발을 건네 받아 제가 가진 마지막 숨을 담아 고요히 입을 맞춘다.) 곧, 이 정류장에 너를 삶으로 돌려보낼 버스가 도착할 거야. 이 꽃다발을 들고 버스에 오르면, 넌 다시 네가 살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오직 그것 하나만을 바라고 또 바랐으므로 어떠한 후회도 미련도 없다. 다만 아까부터 흉하게 떨리는 볼품없는 제 목소리나, 떨림 따위가 네게 전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네가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을, 네게 돌려줄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 사랑. 덧붙이지 않은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헨리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건너편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그에게서 모든 진상을 듣게 된 당신은 숨이 막혀옵니다.
억만 겁의 슬픔 탓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기뻐 보여서였을까요.
문득 그의 어깨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는 전광판이 보입니다.
전광판의 메시지는 우리가 원래 앉아있던 반대편 정류장의 전광판 메시지와 그 내용이 상이합니다.
삶으로의 귀환.
‘삶으로 인도받을 자가 인도자의 이름을 부르면, 삶으로 향하는 생환 버스가 도착합니다.’
헨리:이제, 네가 내 이름을 불러야 할 차례야.
내 이름을 불러줘. ... 내 사랑.
이제 반대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당신이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아실리.
아실리:(길고 긴 이야기의 끝이 맺히고, 너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선택권을 쥐여 주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괜찮다, 괜찮, 아니 괜찮지 않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않고 버텨 보려 했던 다짐이 무너져 내렸다. 행복했던 시간 뒤엔 늘 이별이 있었다. 그저 꿈이길 바랐던 시간은 나를 배신했고, 사랑하는 너는 내게 책임을 전가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그저 너와 함께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는데. 신은 너무 가혹하기만 했다. 나는 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확실치 않을 영원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너와의 이별을 말해야 할지.) …난, 나는.
(또 다시 너를 잃고 지옥 같은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 네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너를 두 번이나 잃고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거란 건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너는, 내가 아는 헨리는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길 원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해야만 하는 선택에 겁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사랑하는 네가 원하는 선택은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네 손을 잡고 너와 같은 길을 걷길 바라지 않을 거라고. 네가 영위해 준 내 삶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길 바라지 않을 거라고.)
(그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네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한참을 입만 벙긋거렸다. 하지만 나는 결국 너와의 이별을 택한다. 네가 지켜낸 내 시간이 이대로 멈추길 바라지 않아서. 사랑하는 너의 이름을, 너와의 이별을 고해야만 한다.) 헨리…, 헨리 맥고윈. 내 사랑하는 사람아.
헨리:(결국 참지 못하고 왈칵 흘러나오는 울음을 감추지 못한다. 진작 눈물 범벅이 되었을 얼굴을 옷으로 닦아내며 와락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지금처럼 네가 길을 잃고 헤매이는 일이 있다면... 늘 너를 마음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는... 내가 언제나 같이 걷고 있다고 생각해 줘. (너는, 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올바른 목적지를 찾을 거야. … 항상 그래 왔으니까. 쿵, 쿵. 일정한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꽉 잡힌 손을 부드럽게 맞잡는다.)
그가 당신에게 입혀준 외투입니다. 아마 오래 전 찍어뒀던 그때의 사진처럼, 영원히 오래도록 기억될 나의 당신.
이미 모든 옷이 세찬 비바람에 거의 다 젖어 버렸습니다. 마치 물 속에 푹 빠졌다가 나왔던 사람처럼.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곧은 몸짓으로 우산을 당신에게 기울여주고 있습니다.
맞잡은 손에는 전혀 온기가 없지만. 몸으로 느끼는 것 그 이상의 온기가 전해져 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정류장 앞에 라이트를 켠 버스가 한 대 정차합니다.
헨리:(우산을 든 손에 함께 들고 있던 국화 꽃다발을 네게 건낸다. 내게 마지막 남은 숨과, 미련과, 숨겨두었던 가장 내밀했던 모든 것까지 전부 까발려지고 건내버리고 나서야 겨우 온전히 너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 이렇듯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멋대로 널 휘둘러버린 날 용서해. 제 속을 채운 일말의 두려움과, 더 이상 전하지 않을 어떤 과거의 사건들은 끌어안고 천천히 옅어질테니 너는 너무 오래 아프지 않길 바란다.)
버스의 번호는, 0709번.
버스의 출입구가 열립니다.
아실리:(눈물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을 닦을 새도 없었다. 네가 내민 꽃다발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이기적인 선택을 해 버린 내 자신이 너무 미워서, 이렇게 정말 마지막을 말해야 하는 이 순간이 싫어서 자꾸만 손이 떨려 온다. 그래도 마지막은, 정말 이별을 고할 수 있는 마지막 지금 순간만큼은, 나를 떠나보내야 하는 네가 안심했으면 해서. 그래서 예쁘게 웃어 보였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과, 진심을 담아 지어보인 웃음. 어쩌면 정말 다음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한 번쯤은 멋대로 해 봐도 되는 거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민 않고 너를 꽉 끌어안아 본다.) 정말 미안해…. 너만 두고 이렇게 떠나서. 나… 네가 준 시간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내 볼게.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목소리가 떨린다. 지킬 자신이 없는 약속을, 하지만 어떻게든 지켜낼 약속을 해 본다. 차갑기만 한 네 품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뛰는 심장 소리는 제 것 하나밖에 들리지 않아서 이 이별이 정말 실감이 났다.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내곤 너의 눈을 마주한다. 떨려서 하지 못했던, 너무 벅차올라서 꺼내지 않으려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해 본다.) 사랑해, 헨리. 안녕, 안녕… 내 사랑아.
제게 안긴 작은 몸을 한껏 끌어안고 다독이고
그 모든 것들이 제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그는 당신을 한껏 다정히 달래 줍니다
마지막.
끝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돌아올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해야겠습니다. 두 번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기에, 삶이란 이토록 한 없이 무한한 성질을 가진 듯 보이지만 유한하기에.
한껏 사랑했고, 사랑했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사랑할 나의...
헨리:(네 이름 한 번을 시원하게 불러 주지 못하고, 이 이상 달래 주지 못하고 그저 끌어안고 버티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라서.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눈가에 흐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네게 깊은 행복과 아름다운 미래가 함께하기를. (내 사랑. 내 과거, 내 현재... 그리고.함께 할 수 없는 미래.) 그것만을 바라.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당신을 끌어안기 위해 그는 결국 우산을 놓아 버렸기에
두 사람은 끝없이 내리는 비를 처음으로 온전히 함께 맞아냅니다.
이곳은 영원히, 끝없이 가라앉을 수몰될 세상.
그는 품에 끌어안은 당신을 들어올려, 발이 젖지 않도록 버스의 입구 위로 올려줍니다.
이미 온 몸이 빗물에 푹 젖어 있는데도.
올라가야 할 시간입니다.
이곳의.
물 밖으로.
아실리:(지금의 선택을 분명 후회하게 될 것 같다고, 네가 없는 미래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지 못했다. 너는 내 행복만을 바라는 사람이니까. 내가 행복하지 못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 안녕을 빌어 주어서. 나도 그래야만 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버스 계단으로 올라선다.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나 보다.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 감정, 미련. 그 미련이 남아 차마 걸음을 더 떼지 못하고, 너를 바라 본 채 눈물만 흘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애써 울음을 참아내며 뒤를 돌아 버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네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당신이 버스에 올라타면 버스의 문이 닫힙니다.
창문을 열면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줍지도 않고, 그저 당신을 올려다 보는 헨리와 눈이 마주칩니다.
버스에 올라탄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늘 당신만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뇨. 어쩌면,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계속.
당신만을 향하고 있었던 그 시선을.
헨리:안녕, 안녕. ...안녕. (사랑했어. 그리고... 사랑해.)
빗소리에 묻힐 법도 하지만, 당신은 그 소리 가운데서도 정확히 그의 목소리를 찾아냅니다.
그에게 무어라 답을 건네기도 전에 버스가 움직입니다.
수몰되는 세계에서, 잠길만큼 물이 도사리고 있는 그 길을 버스가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당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버스 안.
이 주체 할 수 없을 슬픔을 어떻게 견뎌내라는 걸까요.
이제 옆 자리에 더는 네가 없는데, 너 없는 삶 속에서 나는 억겁 같은 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야 할 텐데…
이 슬픔을 어떻게 씻어내야 한다는 말인가요.
넘쳐흐르는 슬픔에 턱 끝에 맺힌 눈물을 훔쳐냅니다.
뺨 위로 번지는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냅니다.
입술 바깥으로 침잠되어 있던 고통이 터집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다시 만나기 전의 수많은 시간을 버텨 내며 나는 아주 많이, 당신이 보고 싶을 겁니다.
눈물에 흠뻑 젖어든 소매는 하얗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환자복 차림입니다. 서서히, 당신의 몸이 현실과 동기화 되어감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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